딜쿠샤 가는법 홍난파가옥 서대문역 앨버트 테일러 가옥 행촌 은행나무 월암동 고향의봄

맛과 멋의 나들이/서울나들이

딜쿠샤 가는법 홍난파가옥 서대문역 앨버트 테일러 가옥 행촌 은행나무 월암동 고향의봄

상피 2022. 11. 10. 14:29
반응형

딜쿠샤 가는 방법

언젠가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보게된 다큐멘터리 딜쿠샤. 3.1운동의 독립선언문을 지키고 우리의 독립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것에 도움을 준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3.14~1948.6.29)의 가옥입니다. 딜쿠샤는 샨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며 테일러 가족이 너무나도 사랑한 집이라고 하죠. 앨버트 테일러의 부인 매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1889.9.14~1982)가 아름드리 은행나무에 반해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마침 계절도 가을이기에 기대하며 가보았습니다.

딜쿠샤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해요. 왜냐하면 따로 주차공간이 없거든요. 5호선 서대문역 지하철 역에서 딜쿠샤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어야 하더라고요. 서대문3번 출구로 나오는 방향대로 쭉 걸어갑니다. 오른쪽 건물의 스타벅스를 지나쳐 걷다보면 육교가 나와요. 육교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꺽어 언덕길을 오르면 됩니다.

보기보다 더욱 가파른 언덕이에요. 언덕을 오르다 보면 서대문교회가 보입니다.
위로 계속 올라가다보면 길이 갈라집니다. 표지판을 보면 계속 올라가는 것이 딜쿠샤 방면이라 되어있는데 그렇게 걸어도 되고 왼쪽으로 가도 딜쿠샤를 갈 수 있습니다.

 


11시 방향은 계속된 언덕길, 9시 방향은 약간의 내리막길 이후 가파른 계단길 혹은 엘레베이터로 갈 수 있습니다.(월암동과 계단길을 지나 걷다보면 학원이 많은 건물이 있는데, 건물을 살짝 지나면 행촌샛길 보입니다. 행촌샛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면 엘레베이터가 나오니 참고하세요.)

월암동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60호
시대: 조선시대
소재지: 서울 종로구 송월동 2-8일대

서대문 밖 1리쯤 되는 곳에 있는 바위산을 월암봉이라 하였는데 바위에 ‘월암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주변 지명으로도 사용되었다. 글자를 쓴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장필과 *미불의 글씨가 유행하던 조선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고고한 선비의 품격이 드러나는 글씨로 붉은 *주사를 채워 넣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백사 이항복의 처조부인 영의정 권철의 저택이 이 동네에 있었다.
월암봉은 주변보다 지대가 높은데다 둥그렇게 생긴 바위의 모습이 마치 달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유원은 송나라 주돈이가 어릴 때 놀던 월암처럼 이 바위산도 깜깜한 밤에 달빛을 받으면 밝게 빛이 나는 것처럼 보여 ‘월암‘이라 한 것으로 보았다. 수십명이 앉을 수 있는 월암봉에 오르면 시야가 넓게 트여 눈을 조망하기에 좋았다고 한다.
*주사: 수은으로 이루어진 황화 광물로 진한 붉은색을 띄고 다이아몬드 광택이 난다.
*장필: 중국 명대 초기에서 중기의 문장가이자 화가로 ‘천진난만. 이것이 나의 스승이다‘라는 시구로 유명하다.
*미불: 중국 북송때의 서화가로 송나라 사대가 한 사람으로 꼽힌다.

딜쿠샤 가는 길에서 만난 홍난파가옥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면 월암근린공원이 나옵니다. 상당히 가파르게 올라 숨은 차지만 탁 트인 조망이 보기 좋네요. 딜쿠샤 방향으로 길을 따라 걷다보니 옛날 건물의 향기를 뿜어내는 집이 보입니다. 자세히 가서 보니 홍난파가옥이라고 해요.

 


홍난파가옥을 지나면서 저 멀리 보이는 은행나무를 향해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딜쿠샤 앞에 있게되네요.

홍파동 홍난파가옥
지정번호: 등록문화재 제90호
시대: 1930년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 2번지 16호

이 집은 지상 1층 지하 1층의 붉은 벽돌조 건물로 독일계통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근처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주변의 건물들은 다 헐리고 이 집만 남아있다. 특히 이 집은<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가 6년간 지내면서 말년을 보냈는데 이 때문에 ‘홍난파 가옥’이라 부르고 있다. 홍난파는 이 집에서 지내면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서쪽 길에서 대문을 통하여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 계단을 따라 현관에 이르게 된다. 이 집의 지붕은 다른 서양 선교사 집보다 경사가 가파르며 거실에는 벽난로가 있다. 남쪽에 있는 현관과 이어지는 복도로 서쪽에 교실, 동쪽에 침실을 두었다. 이 집은 가파른 경사대지를 활용하여 북서쪽에 지하실을 두어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는 1930년대 서양인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층 동쪽에 있던 두 개의 침실은 홍난파 기념관의 전시실로 사용하기 위하여 벽을 터 버림으로써 원래 모습을 잃어버렸다.

노오란 아름드리의 은행나무를 상상하며 왔는데 예상과 달리 은행나무는 푸르렀으며 가지가 군데군데 잘려 약간 초라하게까지 보였습니다. 물론 카메라에 한번에 담기 힘들정도로 위대함을 뽐냈지만 제가 기대한 모습은 아니었어요. 분명 매리 테일러가 반했다는 은행나무의 모습은 이 모습이 아니었을테니까요.

딜쿠샤는 정말 주택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새단장을 해 문화재처럼 보이지만 불과 몇 년전 까지만 해도 이곳에 여러 사람이 살았다는게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분들에게 폐가 되지 않게 조용조용히 관람을 했습니다.

딜쿠샤 정초석
딜쿠샤의 정초석에는 “딜쿠샤 1923 [시편] 127편 1절“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딜쿠샤를 세울 때 테일러 부부는 마을 사람들의 항의와 무당의 저주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유는 은행나무와 샘골이 있던 땅을 당시 한국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었던 앨버트W.테일러는 어려움 속에서도 딜쿠샤를 잘 완공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 덕분이라는 믿음으로 딜쿠샤 정초석에 [시편]127편 1절을 새겨 넣었다.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

딜쿠샤는 미국인 앨버트W.테일러와 아내 메리L.테일러가 1924년에 지은 집으로,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이다.
앨버트W.테일러는 운산금광의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89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광산업과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에는 AP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과 3.1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1942년에 조선총독부의 강제추방에 의해 미국으로 떠났던 앨버트W.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하던 중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1948년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딜쿠샤는 1942년에 테일러부부가 떠난 후 소유주가 바뀌고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면서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 그러던 중 2006년에 아들 브루스 T.테일러가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딜쿠샤의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2021년에 시민들에게 공개하였다.

시간이 지나도 튼튼한 딜쿠샤

내부 사진은 따로 찍지 않았어요. 실내화를 신고 들어가는데 내부는 당시의 테일러부부가 살고 있었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내었답니다. 메리 테일러가 그린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도 있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조화가 어우러진 공간이더라고요.

 


딜쿠샤는 사실 지어진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가는 건물이지만 겉보기에 그리 튼튼해 보일 수가 없어요. 물론 보수를 했지만 기초가 탄탄하지 않으면 튼튼하다 느낄수 없죠? 그 이유는 딜쿠샤 벽돌 쌓기 방식에 있다고 합니다. ‘공동벽 쌓기’라는  방식을 적용해서 만들은 딜쿠샤는 구조적 안정성과 단열, 보온 등의 측면에서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 근대건축에서 유사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매우 독특하고 희귀한 벽돌 쌓기 방식이라고 합니다.

딜쿠샤를 방문하시기 전에 딜쿠샤에 관한 방송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KBS여행 걸어서 세계속으로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있네요. 이 영상을 보고 방문하신다면 딜쿠샤 건물 내부 하나하나가 신기하거든요.

100년의 세월을 바라보는 딜쿠샤. 꼭 한번 방문해 보세요^^

 

반응형